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도 타카토라 (문단 편집) == 여담 == * [[초상화]]에서 드러나듯이 동시대의 [[일본인]]치고는 [[키]]가 매우 큰 거한이었다고 전한다. 알려져 있기로는 6척 2촌.(190대 초반)[* 일설에는 체중도 30관(약 113kg)이었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신장을 감안해도 과체중이기에(BMI 기준으로 약 31) 소위 '근육돼지'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 말년에는 [[눈(신체)|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침실을 나설 때 오늘은 죽는 날이라고 마음 먹어라. 그런 각오가 있다면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 >- 가훈 1조 * 철저한 실력주의자였으며 충의 대신 실력만으로 인생을 살아갔던 토도 타카토라 자신의 가치관을 말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 말년에는 200조항의 가훈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 뭐 주인을 바꿨다고 속인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 타카요시를 [[양자(가족)|양자]]로 들였으나 친아들 타카츠구가 태어나면서 타카요시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뒤 타카토라는 타카요시를 거북하게 생각했으며 타카츠구도 타카요시를 기피했다고 한다. * 유소할 때부터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장년의 유모의 [[젖]]으로는 부족해 여러 여인들의 젖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3살에 [[모찌]] 6개는 먹어치우고 [[성격]]도 거칠어 남들에게 다쳤다고 보고하는 일조차 없었던데다 13살이 되자 형인 타카노리보다 몸집이 커졌다고 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기골장대하고 용맹무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기록과 초상화를 보면 [[말단비대증]]이 의심된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큰 체격과 거친 성격, 늦둥이 아들을 겨우 볼 정도로 70세까지 장수했으면서도 자식 복이 없는 난임에 가까운 삶, 아들 타카츠구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유독 큰 귀와 코, 체격등을 보면 호르몬 이상으로 턱, 귀, 코가 계속 자라고 그 체격의 원인이 유전병일수도 있다. * 1568년 쯤 오다니에 [[도적]]이 출몰했다. 부친 토라타카와 형 타카노리가 이 소식을 듣자 도적을 잡으러 떠났는데 어린 [[나이]]를 이유로 동행을 거부당한 타카토라는 집으로 돌아와 칼을 빼돌려 독자적으로 오다니로 갔다. 이윽고 뒷문에 잠복해 도적을 기다리자 부친과 형이 정면에서 침입을 개시해 도적들은 그대로 뒷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타카토라는 재빨리 도적을 베어넘겨 수급을 챙긴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타카토라의 일을 눈치채자 크게 기뻐하였고 이를 들은 주변의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 1572년 [[야마시타 가스케]]를 살해하고 오다니에서 도망칠 때 그만 추적자에게 발각되고 말아 "문장 옷을 입은 자를 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타카토라는 문장 옷을 뒤집어 입은 상태였고 "자신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답변했기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 1577년 다지마 공격에 타카토라는 120기의 병사를 이끌고 오지로 계곡을 공격했는데 계곡의 [[절(불교)|절]]들을 방화하고 산성을 공격하며 적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성내에서는 거대한 목재와 거석을 연일 떨어뜨려 타카토라의 진공을 막았으며 도치다니 성에서부터 [[엔야 사에몬노죠]]가 구원군으로 와 협격을 당해 군세가 괴멸에 가까운 상황에 빠졌는데 타카토라 또한 단기로 도망쳤다. 이 승리를 틈타 잇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도요토미]] 세력의 도치오 관으로 몰려오자 타카토라는 사력을 다한 전투를 펼쳐나갔고 그 결과 겨우겨우 [[잇키]]를 물리칠 수 있었다. * 1580년 정월에 [[미키 성]]을 공략할 당시 적군의 숙장 [[로쿠로 우에몬]]이 명마에 올라타 출진하는 일이 있었다. 로쿠로 우에몬이 아침의 안개를 이용해 군공을 올리고 귀성하려 하자 타카토라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즉시 로쿠로를 베어버리고 수급을 취해 개선을 이루었는데 이 때 로쿠로 우에몬의 명마는 무사했기에 타카토라는 그 [[말(동물)|말]]을 가지고 돌아와 '가코쿠로'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 1581년에 다지마 원정으로 귀환했는데 마을에 요새를 쌓아 집단을 구성해 마을을 배회하며 농민을 [[약탈]]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며 보고를 들은 히데나가는 타카토라에게 [[철포]] 수 정을 주며 이를 진압할 것을 명했다. 타카토라는 책략을 내어 자신 주변의 다지마 세력들을 포섭해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마을은 요새의 세력을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 중에 한 명의 강용한 젊은이가 있어 요새를 떨어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에 타카토라는 모략으로 그를 조용히 취할 것을 결의하며 [[이아이 마고사쿠]]와 함께 적군의 진지로 숨어들어갔는데 잘못하여 진지의 울타리를 건드려버렸기 때문에 적군에게 들킬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도짓코]]?(...)-- 이윽고 소리를 들은 도적이 울타리를 조사하다 창까지 꺼내 들쑤신 결과 그만 타카토라가 넓적다리--가랑이?--에 창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꿈쩍도 하지 않으며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창을 잡으며 [[피|혈흔]]도 닦아내는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적은 창에 느낌이 전해졌기에 불을 켜 창날을 보았지만 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물러났다. * 다지마에서 도적들을 공격할 당시 도적들이 측면으로 급습을 감행해 타카토라의 군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타카토라는 직접 신가리를 맡아 싸워나갔지만 말이 적들의 공격에 놀라 타카토라를 떨어뜨렸다. 이를 보고 도적들이 몰려오자 타카토라는 맞서 싸웠으나 입고 있던 진바오리가 넝마가 될 정도로 열세에 몰리게 됐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도치오 [[겐사에몬 요시츠구]]라는 자가 달려와 적을 쫓아내며 수장을 베어 타카토라를 구해내었다. 타카토라를 알아본 요시츠구는 자신의 말을 타카토라에게 내어주었고 타카토라는 곧 본진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젊을 적 [[낭인]]으로 떠돌아다닐 때 어느 [[떡]]집에서 무전취식을 했는데 주인이 오히려 노자를 주면서 격려해줬고 타카토라는 후에 [[다이묘]]가 된 뒤 그 집을 찾아가 떡값을 후하게 치렀다고 한다. 기인도 떡 3개이기 때문에 대중매체나 [[동인설정]]에서는 떡을 좋아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 다이묘가 된 이후 [[도미(어류)|도미]]를 대접받았는데 "출세를 하니 이런 진미도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에도 시대]]에만 해도 도미가 비교적 흔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이 일화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평이 있다. * [[오사카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화친하며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는 조건을 걸었는데, 이는 사실 이에야스의 함정이었다. 이에 타카토라의 가신 [[간 미치나가]]는 타카토라의 명으로 매립 공사를 맡고도 이것이 [[무사도]]에 어긋난다며 매립을 거부하며 타카토라와 큰 갈등을 빚었고, 결국 화가 난 타카토라에게 [[할복]]을 명받아 1615년 할복했다고 한다.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도도 다카토라|'''도'''도 '''다'''카토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